안필드의 밤, 리버풀 팬들이 부르는 그 노래에 담긴 것들

화요일 저녁 일곱 시 반, 영국 북서부 항구도시 리버풀. 경기장으로 향하는 길에는 붉은색 머플러를 목에 두른 사람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걷고, 연인이 서로의 손을 잡고 있으며, 혼자 온 중년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 사이를 지나간다. 이들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 안필드. 1892년에 지어진 이 구장은 1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천만 명의 리버풀 팬들을 맞이해왔다.
경기 시작 15분 전, 홈 팀이 웜업을 마치고 라커룸으로 돌아간 뒤, 구장에 묘한 정적이 감돈다. 그리고 누군가 먼저 부르기 시작한다. When you walk through a storm. 뒤이어 수만 명의 목소리가 합쳐진다. Hold your head up high. 머리 위로 붉은 머플러가 일제히 올라간다. 이 광경을 직접 보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영상으로 보는 것과 그 자리에 있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크다. 이 순간을 위해 매주 안필드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리버풀이라는 클럽의 가장 큰 자산은 트로피가 아니라 이 노래를 함께 부르는 사람들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리버풀이 유럽 무대에서 만들어낸 역사적 장면들은 대부분 안필드에서 시작되고 끝났다. 2005년 5월 25일 이스탄불에서 벌어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엄밀히 말해 안필드에서 열린 경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경기를 준비한 곳, 그 경기 이후 트로피가 돌아온 곳, 팬들이 모여서 울고 웃은 곳은 모두 안필드였다. 전반전에 AC 밀란에 0-3으로 끌려가던 팀이 후반 6분 만에 3골을 넣고 결국 승부차기까지 가서 우승한 그 경기는 훗날 이스탄불의 기적이라 불리게 됐다. 스티븐 제라드가 헤더로 첫 골을 넣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을 모든 리버풀 팬들은 기억한다.
14년이 지난 2019년 5월 7일, 안필드는 또 한 번의 기적을 목격했다.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2차전, 바르셀로나 원정에서 0-3으로 패하고 돌아온 리버풀이 안필드에서 뒤집기를 시도한 경기였다. 메시와 수아레스가 이끄는 당시의 바르셀로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상대였다. 게다가 살라와 피르미누까지 부상으로 결장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날 밤 안필드에서 벌어진 일은 축구의 상식을 초월했다. 오리기의 선제골, 바이날둠의 두 골, 그리고 마지막 오리기의 코너킥 기습골. 4-0 승리. 스코어보드가 바뀔 때마다 안필드의 함성은 한 옥타브씩 더 높아졌다. 경기 종료 후 선수들이 관중석 앞에 도열해 You’ll Never Walk Alone을 함께 부르던 장면은 축구 역사에 기록될 만한 순간이었다.
이런 밤들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 많은 분석이 있었다. 전술적인 요소, 선수들의 개인 기량, 감독의 용병술.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한 가지를 더 언급한다. 안필드 관중석의 존재. 특히 골대 뒤쪽에 위치한 콥 스탠드는 전 세계 축구장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응원석 중 하나다. 이곳의 팬들은 90분 내내 서서 응원한다. 실점해도 멈추지 않고, 앞서고 있어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이 관중석의 압력이 원정팀 선수들을 심리적으로 무너뜨린다는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많은 원정팀 감독들이 안필드에서의 경기는 다른 경기장과는 다른 경험이라고 증언해왔다.
리버풀이라는 클럽의 정체성은 이 도시의 역사와 분리할 수 없다. 리버풀은 20세기 중반까지 세계에서 가장 바쁜 항구 중 하나였고, 그만큼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이 도시는 경제적 부침도 여러 번 겪었다. 1980년대 대처 정부 시절의 산업 구조 변화로 리버풀은 특히 큰 타격을 입었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그 시기의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에게 토요일 오후 안필드로 향하는 길은 일상의 탈출구였다. 이런 역사 때문에 리버풀 팬들은 다른 빅클럽 팬덤과는 조금 다른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다.
위르겐 클롭이 2015년 이 클럽에 부임하면서 한 첫 마디도 이런 정서를 정확히 짚어냈다. 우리는 의심하는 사람들을 믿는 사람들로 바꿀 것이다. 클롭은 재임 기간 동안 30년 만의 프리미어리그 우승, 챔피언스리그 우승, FA컵과 리그컵 등 수많은 트로피를 안겼다. 하지만 많은 리버풀 팬들이 기억하는 건 트로피만이 아니다. 클롭이 경기 후 팬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던 모습, 승리 후 선수들과 관중석을 향해 나란히 서서 함께 노래하던 장면들. 이 감독이 클럽의 정서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들이었다.
시대가 바뀌고 선수가 바뀌어도 안필드의 그 노래는 여전히 불린다. 매 경기 시작 전 You’ll Never Walk Alone의 가사 마지막 부분이 울려 퍼질 때, 이 클럽이 130년 동안 지켜온 무언가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트로피는 쌓였다가 쌓이지 않았다가를 반복하지만, 그 노래를 함께 부르는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리버풀이라는 클럽이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특별한 이유일 것이다. 트로피보다 오래가는 것, 그리고 세대를 넘어 전해지는 무언가. 그것이 이 구장에 존재한다.